연구는 전문가가 하는데, 연구를 관리하는 일은 누가 합니까
AI 시대, 관리한다는 것 - 3편
연구소장, 연구기획팀장, 과제책임자. 이런 자리에 계신 분들이 어떤 경로로 그 자리에 오셨는지 떠올려 보시면 대체로 비슷합니다.
연구를 오래 하셨고, 성과를 내셨고, 그래서 관리하는 자리를 맡으셨습니다.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 분야를 모르는 사람이 관리를 할 수는 없으니까요. 도메인을 아는 사람이 관리를 맡는 것은 당연합니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가 조용히 생략됩니다. 관리라는 일 자체에 대한 준비입니다.
지난 편 마지막에 이런 질문을 남겼습니다. 우리 회사 업무와 프로젝트의 속성을 정의하는 일, 그건 누가 합니까. 오늘은 그 이야기입니다.
연구는 공학인데, 연구 관리는 상식입니까
연구개발은 전문 영역으로 대접받습니다. 전공이 있고, 방법론이 있고, 축적된 이론이 있습니다. 그 분야를 모르는 사람이 하면 안 된다는 합의도 있습니다. 화학을 모르는 사람에게 합성 과제를 맡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연구를 관리하는 일은 대체로 그렇게 취급되지 않습니다.
관리에 대해서는 이런 인식이 은연중에 깔려 있습니다. 열심히 챙기면 된다. 꼼꼼하면 된다. 경험이 쌓이면 는다. 그러니까 상식과 성실함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 인식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닙니다. 성실함은 정말 중요합니다. 다만 그것만으로 되는 일은 아닙니다.
프로젝트 관리는 60년 넘게 축적되어 온 분야입니다. 그 안에는 방법론이 있고, 각 방법이 언제 작동하고 언제 무너지는지에 대한 지식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지식은 배워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관리 기술의 실체를 한번 펼쳐 보겠습니다
추상적으로 말하면 와닿지 않으니, 실제로 어떤 선택지들이 있는지 보겠습니다. 일정 하나만 봐도 이렇습니다.
| 관리 영역 | 선택해야 할 것 | 선택에 따라 달라지는 것 |
|---|---|---|
| 일정 | 간트 차트 / PERT·CPM / 마일스톤 중심 / 체크리스트, 작업 분해 수준 | 탐색 과제에 간트를 그리게 하면 지킬 생각 없는 일정을 매달 수정하게 됨 |
| 비용 | 총액 / 비목별 / 기간×비목, 실적 수집 방식, 회계 계정 매핑 | 정밀할수록 정보는 좋아지고 연구 시간은 줄어듦 |
| 인력 | 참여자만 / 참여 기간 / 참여율, 시간 단위 vs 인월, 계획·실적 병행 여부 | 측정 수준에 따라 연구원의 기록 부담이 비례 |
| 전략 수준 | 우선순위 기준, 위험·기대수익 비교, 전략-로드맵-과제 계층, 포트폴리오 분류 | 전략과 과제의 연결이 없으면 "왜 이 과제를 하는가"에 답 없음 |
이 목록을 보시면 아실 겁니다. 이건 상식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각 방식이 어떤 상황에서 유효하고 어떤 상황에서 역효과를 내는지를 알아야 고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지식은 이미 축적되어 있습니다. 배우면 되는 것입니다. 다만 배우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배우지 않은 상태로 관리를 하면
관리를 전문 영역으로 다루지 않을 때 나타나는 증상이 몇 가지 있습니다. 저희가 여러 회사에서 반복해서 본 것들입니다.
첫째, 관리 항목을 늘리는 것이 관리 강화라고 생각합니다.
문제가 생기면 항목을 추가합니다. 보고 주기를 줄입니다. 양식을 하나 더 만듭니다. 각각은 다 이유가 있는 조치입니다.
관리 항목에는 비용이 있습니다. 그 비용은 연구원의 시간으로 지불됩니다. 항목이 열 개일 때와 서른 개일 때, 연구원이 연구에 쓸 수 있는 시간은 다릅니다. 관리 항목의 적정 수준을 판단하는 것 자체가 전문성입니다.
둘째, 성격이 다른 과제를 같은 양식으로 관리합니다.
탐색 과제와 개량 과제, 3개월짜리와 3년짜리, 세 명이 하는 것과 서른 명이 하는 것을 같은 계획서 양식에 넣습니다. 관리하는 입장에서는 통일하는 것이 편하니까요.
그런데 통일된 양식은 결국 가장 복잡한 과제를 기준으로 만들어집니다. 그러면 작은 과제를 하는 사람이 쓸 데 없는 칸을 채웁니다. 반대로 가장 단순한 과제를 기준으로 만들면 큰 과제가 관리되지 않습니다.
셋째, 시스템을 고를 때 무엇을 물어야 할지 모릅니다.
이게 지난 편과 이어지는 지점입니다. 우리 프로젝트의 성격이 무엇이고 그래서 어떤 관리 방식이 맞는지에 대한 판단이 없으면, 시스템을 평가할 기준도 없습니다. 기준이 없으면 남는 것은 기능 개수와 도입 사례의 수뿐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여기서 분명히 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개인의 역량 문제가 아닙니다. 시대의 산물입니다.
우리 산업이 압축 성장해 온 시기를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됩니다. 그때는 목표가 명확했습니다. 앞서간 곳이 무엇을 만들었는지 알 수 있었고, 우리는 그것을 더 빨리 더 싸게 만들면 됐습니다.
특히 우리 산업의 뼈대를 이룬 중후장대형 산업에서는 R&D의 역할이 상당히 분명했습니다. 설비의 효율을 높이고, 공정에서 생기는 문제를 푸는 것. 무엇을 만들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고, 어떻게 더 잘 만들지가 과제였습니다.
이런 일에는 기획이 거의 필요하지 않습니다. 문제가 눈앞에 있고, 해결하면 되고, 성과는 수율이나 원가로 즉시 나타납니다. 관리는 진척을 확인하는 일이 됩니다. 방향을 정하는 일이 아니라 잘 되어 가고 있는지 챙기는 일입니다.
정리하면 관리 전문성이 필요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 시기에는 그것이 관리의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그 판단은 그때 옳았습니다. 실제로 그 방식으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문제는 조건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앞서간 곳을 보고 따라갈 수 없는 영역이 생겼고, 무엇을 할지부터 정해야 하는 프로젝트가 늘었습니다. 실행이 부실해서 생기는 손실보다 방향이 틀려서 생기는 손실이 훨씬 큽니다.
경력 경로(Career Path)가 하나뿐이었던 이유
이 이야기는 사람의 문제로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관리가 진척 확인이고 기획이 큰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 조직에서는, 경력 경로가 자연스럽게 하나로 정리됩니다. 연구원에서 팀장으로, 실장으로, 소장으로, 원장으로. 잘하는 사람이 위로 올라가는 단일한 사다리입니다.
이 구조에서 관리 전문성은 별도로 축적되지 않습니다. 위로 올라가면 관리를 하게 되고, 관리를 하다 보면 는다는 것이 전제입니다.
그리고 이 구조에는 더 아픈 면이 있습니다. 사다리가 하나뿐이면, 그 사다리를 오르지 못한 사람은 갈 곳이 없습니다.
특정 기술을 20년 다룬 사람이 있다고 해봅시다. 그 사람이 조직 관리에는 관심도 소질도 없다면, 이 구조 안에서 그 사람의 자리는 어디입니까. 기술은 회사에서 가장 깊은데 직급은 올라가지 않고, 어느 순간부터는 후배가 상급자가 됩니다. 그러다 조용히 나갑니다.
회사는 그 사람의 20년을 잃고, 그 사람은 자기 전문성이 인정받는 자리를 회사 밖에서 찾습니다. 첫 번째 글에서 이야기한 상황이 여기서 다시 나옵니다.
| 지금 필요한 경력 경로 | 요구되는 전문성 |
|---|---|
| 순수 기술 전문 | 특정 기술 영역의 깊이 |
| 전략 · 기획 전문 | 방향을 정하고 판단하는 능력 |
| 프로젝트 관리 전문 | 분야별 관리 방법론과 실행 경험 |
| 외부 조달 · 계약 전문 | 기술 거래, 협상, 관계 관리 |
| M&A 전문 | 실사, 가치 평가, 통합 관리 |
각각이 다른 전문성이고, 각각이 회사에 필요합니다. 그리고 각각에 이름과 자리가 있어야 사람이 그 방향으로 자랍니다.
기술경영(MOT)이라는 학문 분야가 있습니다. 연구를 어떻게 기획하고, 포트폴리오를 어떻게 구성하고, 기술을 언제 사 오고 언제 직접 할지를 다룹니다. 그런데 기업 현장에서 이 전문성이 정면으로 요구되는 자리가 얼마나 됩니까.
여기까지 오면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그 갈래를 나눈다는 건 구체적으로 무슨 뜻입니까. 조직을 쪼개자는 이야기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이나 조직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일을 기능 단위로 나누는 것이 먼저이고, 그 다음에 각 기능이 무엇에 대해 책임지는지를 정하는 순서입니다. 이 이야기는 시리즈 뒤쪽에서 두 편에 걸쳐 따로 다루겠습니다.
저희도 자유롭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 저희 쪽 사정도 말씀드려야 공평할 것 같습니다.
시스템을 만드는 회사도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고객사에 가서 "귀사의 프로젝트는 어떤 성격이고, 그래서 어떤 관리 방식이 맞는지부터 정리해 봅시다"라고 말하는 것보다, 준비해 간 기능 목록을 펼치는 쪽이 훨씬 쉽습니다. 시간도 적게 들고 계약도 빨리 됩니다.
관리 방식을 함께 설계하는 일은 오래 걸리고, 답이 하나로 나오지 않고, 무엇보다 파는 쪽 입장에서 표준화가 안 됩니다. 그래서 업계 전체가 그 방향으로 잘 가지 않습니다.
이건 저희가 25년 동안 계속 붙들고 있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정리하면
관리는 배워야 하는 기술입니다.
무엇을 관리하고 무엇을 관리하지 않을지, 어느 수준까지 관리할지, 성격이 다른 일을 어떻게 다르게 다룰지. 이런 판단에는 축적된 지식이 필요합니다. 성실함만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전문성이 조직 안에 쌓이지 않으면, 앞의 두 편에서 이야기한 문제들이 반복됩니다. 관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정의되지 않고, 정의되지 않으니 시스템을 고를 기준도 없고, 기준이 없으니 남들이 쓰는 것을 사게 됩니다.
여기까지가 진단입니다. 세 편에 걸쳐 무엇이 문제인지를 이야기했습니다.
다음 편부터는 방향을 바꾸겠습니다. 그럼 도대체 무엇을 관리해야 하는가.
회사가 실제로 하는 일이 무엇이고, 그것을 관리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부터 다시 세워 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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