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스템을 도입했는데, 왜 관리 수준은 그대로입니까
AI 시대, 관리한다는 것 - 2편
시스템을 도입하고 2~3년쯤 지난 회사에 가면 비슷한 말을 듣습니다.
"들어가긴 다 들어갔는데요, 실제로 쓰는 건 몇 개 안 됩니다."
그리고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이런 말이 따라옵니다. 도입할 때는 이걸 넣으면 일하는 방식이 바뀔 거라고 했는데, 지금 보면 하던 방식 그대로 하면서 화면만 하나 더 늘어난 것 같다고요.
저희는 25년 동안 시스템을 만들어 판 회사입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의 바깥에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글은 조금 불편할 수도 있겠습니다.
순서가 뒤집혀 있습니다
원래 순서는 이렇습니다.
- 우리 회사의 업무와 프로젝트가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 정의한다
- 그 성격을 관리하려면 어떤 기능이 필요한지 도출한다
- 그 기능을 만들거나 사 온다
현실에서는 자주 반대로 갑니다. 좋다고 알려진 시스템을 먼저 고르고, 그 시스템이 제공하는 기능에 우리 업무를 맞춥니다. 그러면서 그것을 "선진 프로세스 도입"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에는 하나의 믿음이 깔려 있습니다. 잘 만들어진 시스템 안에는 좋은 관리 체계가 들어 있고, 그것을 도입하면 우리 관리 체계도 그 수준이 된다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시스템은 관리 체계를 담는 그릇이지 만들어 주는 도구가 아닙니다.
우리 회사 프로젝트의 속성은 무엇입니까
그럼 먼저 정의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부터 보겠습니다. R&D 조직이라면 최소한 이 정도는 답이 있어야 합니다.
| 질문 | 왜 중요한가 |
|---|---|
| 수주형인가, 성과물형인가 | 수주형은 납기·원가·품질이 축, 신제품/신기술 과제는 그 축으로 관리 불가 |
| 목표가 명확한가, 불확실한가 | 같은 양식에 넣으면 한쪽은 반드시 거짓말을 하게 됨 |
| 연구인가, 개발인가 | 연구의 실패는 정보, 개발의 실패는 손실 — 기록과 대응이 달라야 함 |
| 규모는 어떠한가 | 3명 6개월 과제에 30명 3년 과제와 같은 관리 항목을 요구하면 앞의 과제는 관리 때문에 일을 못 함 |
이 질문들에 답하지 않은 채 시스템을 고르는 것은, 몸을 재지 않고 옷을 사는 것과 같습니다. 좋은 옷일 수는 있습니다. 다만 그것이 나에게 맞는 옷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정답이 있는 영역에서는 기능 차이가 나기 어렵습니다
여기서 조금 예민한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지난 편에서 거래 처리 업무의 성격을 정리했습니다. 정해진 규정과 규칙에 따라 틀리지 않게 처리하는 일이고, 창의성이 개입해서는 안 되는 영역이라고요.
그렇다면 이 영역에는 정답이 있습니다. 회계 기준이 정해져 있고, 세법이 정해져 있고, 재고 평가 방법이 정해져 있습니다.
정답이 있는 일에서는 제품 간 기능 차이가 벌어지기 어렵습니다. 전표를 끊고, 원가를 집계하고, 재고를 차감하고, 결산을 하는 일에서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이 나오기는 어렵습니다.
오해가 없도록 분명히 하겠습니다. 이것은 제품 간에 차이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차이는 분명히 있고, 어떤 기업에는 그 차이가 결정적입니다.
그럼 차이는 어디에서 납니까
실제로 차이가 나는 지점은 이런 것들입니다.
| 차별 요소 | 내용 |
|---|---|
| 다국적 운영 대응 | 여러 나라의 회계 기준·세제·통화를 동시에 다루는 능력 |
| 지원 조직과 인력 시장 | 문제 발생 시 부를 수 있는 사람, 담당자 교체 시 채용 용이성 |
| 주변 생태계 | 부가 제품, 연동 사례의 축적 정도 |
| 도입 사례의 수 | 앞서 해본 회사가 많다는 것 자체의 가치 |
전부 진짜 가치입니다. 이런 이유로 특정 제품을 선택하는 것은 합리적인 판단입니다.
다만 이 가치들의 정체를 정확히 볼 필요는 있습니다. 이것은 "그 제품의 관리 기능이 더 우수하다"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도입 논의 과정에서는 이 둘이 자주 하나로 섞입니다. "글로벌 표준"이라는 표현 안에서 두 가지가 구분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지난 편의 이야기와 만납니다. 어차피 정답이 정해져 있어 어느 제품으로도 되는 영역에 조직의 관심과 자원이 집중되는 동안, 정답이 없어서 우리가 직접 설계해야만 하는 영역은 순서가 뒤로 밀립니다.
사는 쪽에도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야기가 파는 쪽 문제로만 읽힐 수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사는 쪽에도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쪽이 더 중요합니다.
경영학에서 대리인 문제(agency problem)라고 부르는 것이 있습니다. 회사의 의사결정을 하는 사람이 회사의 주인이 아닐 때 생기는 구조적 어긋남입니다. 이 구조를 IT 투자에 대입해 보면 이렇게 됩니다.
의사결정자에게는 임기가 있습니다. 관리 체계를 제대로 손보는 일은 성과가 늦게 나오고,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반면 시스템 도입은 즉시 보이고, 날짜가 찍히고, 보고서에 한 줄로 정리되고, 개인의 이력에 남습니다.
실패했을 때의 셈법도 다릅니다. 널리 쓰이는 제품을 도입했다가 잘 안 되면 "그 시스템이 우리와 맞지 않았다"가 됩니다. 반면 우리 방식대로 설계했다가 잘 안 되면 그 사람의 판단 실패가 됩니다.
그래서 검증된 것을 사는 쪽이 개인에게 합리적입니다.
이 대목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 누군가의 잘못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각자 자기 위치에서 합리적으로 판단했는데 회사 전체로는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오는 구조입니다. 구조를 보지 않고 사람을 탓하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 같은 회사도 이 구조 안에 있습니다. 고객사에 가서 "귀사의 프로젝트 속성부터 정의해 봅시다"라고 말하는 것보다, 기능 목록을 펼쳐 놓고 설명하는 쪽이 훨씬 쉽고 빠르게 팔립니다.
경영 유행이라는 말
이런 현상을 설명하는 개념이 있습니다. 경영학자 에릭 에이브러햄슨이 1996년에 정리한 경영 유행(management fashion)입니다.
요지는 이렇습니다. 어떤 경영 기법이 널리 퍼지는 것은 그 기법이 우수하다는 증명이 아닙니다. 유행을 만들어 내는 집단 — 컨설팅 회사, 경영대학원, 경제 매체, 유명 경영자 — 이 그것을 합리적이고 진보적인 것으로 포장해 유통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유행은 왔던 만큼 갑니다.
여기에 우리나라 특유의 사정이 하나 더 겹칩니다. 선진국에서 만들어진 시스템과 논리를 그것이 만들어진 배경은 빼고 결과물만 들여오는 경향입니다. 그 시스템은 그 나라의 기업 문화, 직무 정의 방식, 권한 위임 구조, 계약 관행 위에서 설계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대체로 그 전제는 함께 사지 않습니다.
그리고 막상 잘 안 맞으면 이런 결론에 도달합니다. 우리 업무 방식이 후진적이라서 안 맞는다.
저는 이 결론이 자주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안 맞는 옷을 입고 몸이 잘못됐다고 말하는 셈입니다. 물론 정말로 우리 방식을 고쳐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만 그 판단을 하려면, 우리 방식이 무엇인지가 먼저 정의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럼 무엇을 했어야 했습니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시스템은 관리 체계를 담는 그릇입니다. 좋은 그릇을 사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담을 것을 정리하는 일은 사 올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 회사가 직접 해야 하는 일이고, 정답이 없는 일이고, 그래서 어려운 일입니다.
그리고 그 일에는 순서가 있습니다. 우리 업무와 프로젝트의 속성을 정의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 다음에 필요한 기능이 나옵니다. 그 다음에 만들거나 사면 됩니다.
여기까지 오면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이 생깁니다. 그 정의는 누가 합니까.
업무의 속성을 파악하고, 관리해야 할 것과 하지 않아도 될 것을 가르고, 관리 항목의 적정 수준을 판단하는 일. 이건 상식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축적된 지식이 필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일을 오랫동안 "직책을 맡으면 하게 되는 일" 정도로 다뤄 왔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그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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