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D 계획에 포함되지 않는 것
AI 시대, 관리한다는 것 - 10편
3년 전에 세운 계획이 있습니다. 지금 보면 왜 그렇게 했는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때 담당자에게 물어보면 대개 이렇게 답합니다. "그땐 그게 맞았어요."
맞는 말입니다. 그때는 맞았습니다. 다만 무엇 때문에 맞았는지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지난 편에서 계획을 확정하는 순간 두 가지가 함께 만들어진다고 했습니다. 결정의 기록과 전제입니다. 오늘은 그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이 시리즈에서 가장 실무적으로 중요한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계획서에는 결론만 있습니다
계획서를 펼쳐 보면 이런 것들이 적혀 있습니다. 목표, 일정, 투입 인력, 예산, 단계별 산출물, 성공 기준.
전부 결론입니다. 무엇을 언제까지 얼마를 들여 하겠다는 것이요.
그런데 그 결론에 이르기까지 담당자의 머릿속에서는 여러 가지가 계산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계산은 몇 가지 조건이 유지된다는 가정 위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입니다.
이 제품의 약가가 지금 수준으로 유지될 것이다.
그 특허가 재작년에 파악한 시점에 풀릴 것이다.
이 원료를 그 단가로 계속 조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분야에 경쟁사가 아직 들어오지 않았고 당분간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규제 방향이 지금 논의되는 쪽으로 갈 것이다.
이 위탁 기관의 처리 기간이 지금과 비슷할 것이다.
이 중 하나만 바뀌어도 계획의 타당성이 달라집니다. 그런데 계획서 어디에도 이것들은 적혀 있지 않습니다.
왜 안 적힐까요
숨기는 것이 아닙니다. 이유는 훨씬 단순합니다.
너무 당연해서입니다.
계획을 세우는 시점에 그 조건들은 그냥 세상의 배경입니다. 약가가 그 수준인 건 사실이고, 특허 만료일은 정해져 있고, 원료는 늘 그 단가였습니다. 이걸 굳이 적으라고 하면 오히려 이상합니다. 지금 서울에 있다는 걸 회의록에 적지 않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두 번째 이유가 겹칩니다. 적으라고 해도 무엇을 적어야 할지 모릅니다.
"이 계획의 전제를 적으세요"라는 칸이 있으면, 대부분의 사람이 잠시 멈춥니다. 전제라는 게 워낙 많고, 어디까지가 적을 만한 것인지 기준이 없습니다. 지구가 돈다는 것도 전제이긴 하니까요. 그러다 결국 "기술 개발이 계획대로 진행될 것" 같은 무의미한 문장을 적고 넘어갑니다.
그래서 빈 칸을 주는 방식으로는 안 됩니다. 이게 설계상 중요한 지점입니다.
유형을 먼저 주는 이유
빈 칸 대신, 어떤 종류의 전제가 있는지를 미리 정리해서 제시하는 방식을 씁니다.
우리 회사의 계획들을 흔들 수 있는 조건들이 무엇인지는 사실 몇 가지 유형으로 정리됩니다.
| 전제 유형 | 예시 |
|---|---|
| 규제 · 정책 | 약가 수준, 허가 기준, 규제 방향 |
| 가격 · 원가 | 원료 단가, 위탁 비용, 환율 |
| 특허 · 권리 | 특허 만료일, 라이선스 조건 |
| 경쟁 상황 | 경쟁사 진입 여부, 시장 점유 구도 |
| 기술 성숙도 | 핵심 기술의 검증 수준, 스케일업 가능성 |
| 공급망 | 위탁 기관 처리 기간, 원료 공급 안정성 |
| 파트너 관계 | 공동연구 기관, 기술 도입처 협력 지속 |
이 유형들이 앞에 놓여 있으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백지 앞에서 "무엇이 전제였지"를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목록을 보면서 "이건 해당되네, 이건 아니네"를 고르는 것이 됩니다. 훨씬 쉽고, 빠지는 것도 적습니다.
그리고 유형이 정해져 있으면 다른 이점이 생깁니다. 나중에 규제가 바뀌었을 때, 규제를 전제로 삼은 계획이 어느 것들인지 한 번에 찾을 수 있습니다. 각자 자유롭게 적어 놓았으면 이게 안 됩니다.
리스크와는 다른 것입니다
여기서 흔한 오해를 하나 정리하겠습니다. "우리는 이미 리스크 관리를 하고 있는데요"라는 반응이 자주 나옵니다.
둘은 다릅니다.
| 구분 | 리스크 | 전제 |
|---|---|---|
| 정의 | 나쁜 일이 생길 수 있다는 예측 | 지금 이것이 사실이라고 보고 계획했다는 선언 |
| 다루는 것 | 일어날 수 있는 일 | 이미 그렇다고 믿고 있는 것 |
| 목록에 오르는 것 | 우리가 걱정하는 것들 | 우리가 걱정조차 하지 않는 것들 |
| 대비 | 대응책을 미리 준비 | 아무도 안 보고 있음 |
계획을 실제로 무너뜨리는 것은 대체로 후자입니다. 걱정하고 있던 것은 대비가 되어 있습니다. 무너뜨리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겨서 아무도 안 보고 있던 것입니다.
적어 두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전제를 적어 두면 절반은 된 것입니다. 나머지 절반이 더 중요합니다.
그 전제가 흔들리는지 누가 지켜봅니까.
적어만 두면 그 기록은 계획서와 함께 잠듭니다. 3년 뒤에 문제가 터지고 나서 "아, 그때 이걸 전제로 했었지"라고 확인하는 용도밖에 안 됩니다.
그래서 전제마다 무엇을 보면 이것이 흔들리는 줄 알 수 있는지를 함께 정합니다. 어떤 기관의 어떤 발표를 봐야 하는지, 어떤 지표가 어느 선을 넘으면 신호인지, 어떤 검색어가 걸리면 확인해야 하는지.
이걸 정해 두면 전제가 감시 대상이 됩니다. 잠들어 있는 기록이 아니라 살아 있는 조건이 됩니다.
여기서 지난 편의 이야기와 연결됩니다. 전제가 무너져서 과제가 접힌 것 자체는 누구의 잘못도 아닙니다. 다만 신호가 있었는데 아무도 보고 있지 않아서 3년을 더 간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무엇을 지켜볼지가 정해져 있으면 이 구분이 가능해집니다.
전제도 상태를 갖습니다
과제에 상태가 있듯이 전제에도 상태가 있습니다.
| 상태 | 의미 | 예시 |
|---|---|---|
| 유효 | 아직 그대로 | 기본 상태 |
| 감시 중 | 흔들릴 조짐이 보임 | 관련 논의 시작, 지표 움직임 |
| 조건부 무효 | 사실상 바뀌었으나 미확정 | 규제 개정안 발표, 시행 전 |
| 폐기 | 명확히 바뀜 | 규제 시행, 경쟁사 진입 확인 |
상태를 나누는 이유는, 바뀌는 순간이 아니라 흔들리기 시작하는 순간에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규제가 시행된 다음에 알면 이미 늦습니다. 개정안이 나온 시점에 알면 대응할 시간이 있습니다.
별도 문서를 하나 더 만드는 일이 아닙니다
여기까지 읽으시면 이런 생각이 드실 수 있습니다. 결국 계획서 말고 전제 관리 문서를 하나 더 만들라는 이야기 아닌가.
그렇게 되면 안 됩니다. 지난 편에서 이야기한 원칙이 여기서도 그대로입니다. 기록이 별도 업무가 되면 결국 안 남습니다.
그래서 전제를 적는 자리는 계획을 등록하고 확정하는 화면 안에 있어야 합니다. 별도 문서가 아니라 계획의 일부입니다. 목표를 적고, 일정을 적고, 그 옆에서 전제 유형을 고르고 무엇을 지켜볼지 정합니다.
담당자 입장에서는 계획을 확정하는 하나의 작업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로 감시 대상이 생깁니다.
이게 이 시리즈에서 계속 이야기해 온 원칙입니다. 기록은 일을 하고 나서 따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일을 하면 남는 것이어야 합니다.
전제를 적었고, 무엇을 지켜볼지도 정했습니다. 그럼 실제로 밖에서 그 신호가 발생했을 때, 그것이 어떻게 우리에게 도달합니까.
이게 다음 문제입니다. 정보는 넘칩니다. 문제는 그 많은 것 중에서 우리 전제를 건드리는 것이 어떻게 걸러져서, 누구에게 가서, 언제 판단되는가입니다.
다음 편에서 그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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