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st Follower의 관리체계로 First Mover를 할 수 있을까
실무이야기 - 2
들어가며
지난 글에서 R&D Project가 어떤 속성을 갖는지 살펴봤습니다. 착수 시점에 계획을 확정할 수 없고, Research와 Development가 다르고, 유형이 혼재하며, 관리의 목표가 QCD가 아니라 Outcome이라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렇다면 국내 기업들은 이 속성을 어떻게 다루고 있을까요.
오늘은 조금 불편할 수도 있는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다만 미리 말씀드리면, 이 글은 어느 기업을 지적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왜 지금과 같은 관리체계가 자리 잡았는지, 그리고 왜 지금 그것이 삐걱거리는지를 짚어보려는 것입니다.
1. 관리체계에는 그 기업의 문화가 담깁니다
같은 방법론을 도입해도 기업마다 전혀 다르게 자리 잡습니다. 같은 패키지를 넣어도 A사에서는 활발히 돌아가고 B사에서는 6개월 만에 죽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프로젝트 관리 체계에는 그 기업의 오랜 세월 굳어진 기업 문화, 특히 의사결정 문화가 함께 담기기 때문입니다.
관리체계를 뜯어보면 그 조직에 대한 정보가 그대로 드러납니다.
- 누가 무엇을 결정하는가 (의사결정 구조)
- 어디까지 위임되어 있는가 (권한)
- 실패를 어떻게 다루는가 (평가와 보상)
- 무엇을 기록으로 남기는가 (기록의 목적)
시스템은 이 답들을 화면과 결재선의 형태로 굳혀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문화를 바꾸지 않고 시스템만 바꾸면 원래대로 돌아갑니다. 반대로, 시스템을 만드는 과정이 문화를 점검하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이 관점에서 국내 기업의 R&D 관리체계를 보면, 거기 담긴 문화가 보입니다.
2. Fast Follower 시대의 관리체계 — 그것은 옳은 선택이었습니다
한국 산업의 압축 성장기를 떠올려 보겠습니다.
그 시기 기업의 목표는 명확하게 주어져 있었습니다. 앞서간 기업이 만든 제품이 이미 시장에 있었고, 해야 할 일은 그것을 더 빠르게, 더 싸게, 더 낫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목표가 명확하고, 단순하고, 안정적이었던 환경입니다.
이 조건에서는 어떤 관리가 최적일까요.
- 명확한 계획을 세우고
- 각자에게 할당(Assign)하고
- 매뉴얼과 절차에 따라
- 빠르게 실행하고
- 계획 대비 실적(Plan/Actual)을 점검한다
속도가 곧 경쟁력이었고, 중요한 질문은 "What"이나 "Why"가 아니라 "How"였습니다. 무엇을 왜 만들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으니까요.
이 방식은 실책이 아닙니다. 당시 환경에 대단히 잘 맞았고, 실제로 성공했습니다. 한국 산업이 반세기 만에 이룬 성취가 그 증거입니다.
그리고 R&D 관리도 자연스럽게 이 논리를 따라갔습니다. 일정 준수, 원가 절감, 개발 건수. 앞선 제품을 목표로 두고 그것을 얼마나 빨리 따라잡았는가로 성과를 측정하는 체계입니다.
다만, 건너뛴 것이 있습니다
문제는 그 성장이 압축적이었다는 데 있습니다.
서구 기업들이 백 년에 걸쳐 겪은 규모 확대(Scale-up) 과정을 한국 기업은 수십 년 만에 통과했습니다. 그 속도 덕분에 얻은 것도 많지만, 그 과정에서 차분히 축적했어야 할 것들을 건너뛰었습니다.
- 일하는 방식(Work Style)을 조직 차원에서 다듬는 시간
- 전략과 기획 기능을 전문 영역으로 키우는 시간
- 판단의 근거를 문서로 남기고 되짚어보는 관행
지금 많은 기업의 R&D 관리에서 나타나는 문제들은, 상당 부분 이 '건너뛴 구간'에서 비롯됩니다.
3. 그런데 게임의 규칙이 바뀌었습니다
산업의 경계가 무너지고 변화 속도가 임계점을 넘어섰습니다. 이제 상당수 영역에서 따라갈 앞선 제품이 없습니다.
First Mover의 R&D는 이전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 목표를 스스로 정의해야 합니다. 무엇을 만들지, 왜 만들지부터 답해야 합니다. 이제 중요한 질문은 "How"가 아니라 "Why & What"입니다.
- 불확실성이 기본값입니다. 목표가 불명확하고, 복잡하고, 계속 변합니다.
- 계획이 살아 움직여야 합니다. 확정된 계획 대비 실적(Plan/Actual)을 점검하는 방식으로는 부족합니다. 외부 환경 정보에 따라 계속 갱신되는 계획, 즉 Alive Plan이 필요합니다.
- 시선이 밖을 향해야 합니다. 내부 목표 달성이 아니라 외부 환경 대응이 관리의 중심이 됩니다.
- 수행 방법도 다양해집니다. 내부 개발(Insourcing)만이 아니라 Outsourcing, 공동연구, License In/Out, M&A, 그리고 외부와 결합하는 X&D까지 R&D의 범위 자체가 넓어집니다.
문제는, 관리체계가 여전히 예전 질문을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일은 First Mover의 방식으로 하라고 하면서, 관리와 평가는 Fast Follower 시대의 기준으로 합니다. 여기서 어긋남이 생깁니다.
- 탐색 과제가 홀대받습니다. First Mover에게는 무엇을 만들지 찾아내는 일이 가장 중요해졌는데, 조직의 인식은 아직 따라오지 못했습니다. 일정을 못 박을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지연 과제'가 됩니다.
- 계획 변경이 실패로 읽힙니다. 여러 관점에서 접근하다 보면 계획은 당연히 바뀝니다. 연구가 살아 있다는 신호인데, 관리체계는 이것을 이탈로 기록합니다. 실패한 시도의 데이터도 같은 이유로 버려집니다.
- 정량 지표만 남습니다. 일정 준수율, 예산 집행률, 특허 건수. 원래 수주형 프로젝트의 QCD를 재기 위해 만들어진 지표들입니다. R&D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무엇을 알게 되었고, 우리 기술 자산에 무엇이 더해졌는가" 같은 정성적 판단인데, 세기 어려워서 평가에서 빠집니다.
이것은 연구원의 문제도, 관리자의 문제도 아닙니다. 체계가 그렇게 설계되어 있으면 합리적인 사람일수록 그렇게 행동합니다.
4. 선정의 책임과 실행의 책임이 섞여 있습니다
앞의 문제들이 겹쳐서 만들어내는 결과가 하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First Mover 전환에서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저희는 봅니다.
과제를 무엇을 할지 정하는 것과, 정해진 과제를 해내는 것은 서로 다른 일입니다.
선정의 책임은 기획의 몫입니다. 시장과 기술의 방향을 읽고, 우리가 어디에 자원을 걸어야 하는지 판단하는 일입니다. 여기서 요구되는 역량은 정보 수집력, 분석력, 그리고 판단력입니다.
실행의 책임은 R&D의 몫입니다. 정해진 방향에서 기술적 문제를 풀어내는 일입니다. 여기서 요구되는 역량은 전문성과 문제 해결력입니다.
성격이 다른 두 가지 일인데, 국내 기업에서는 이 둘이 대체로 한 사람에게 얹혀 있습니다. 연구책임자가 과제를 제안하고, 승인받고, 수행하고, 결과까지 책임집니다.
이렇게 되면 무슨 일이 생기는가
- 실패의 원인을 가릴 수 없습니다. 과제가 실패했을 때, 애초에 방향이 틀렸던 것인지 실행이 부족했던 것인지 구분되지 않습니다. 두 책임이 한 사람에게 있으니 그냥 "그 사람이 못한 것"이 됩니다.
- 그래서 안전한 과제만 올라옵니다. 선정 책임까지 자기가 지는 상황에서 합리적인 선택은 하나뿐입니다. 실패하지 않을 과제를 고르는 것. 그리고 실패하지 않을 과제는 대개 First Mover의 과제가 아닙니다.
- 중단 결정을 아무도 내리지 못합니다. 과제를 접는다는 것은 그것을 제안한 사람이 자기 판단이 틀렸다고 인정하는 일이 됩니다. 그래서 성과가 나오지 않는 과제가 몇 년씩 연장됩니다.
- 기획 역량이 자라지 않습니다. 기획이 실행에 묻혀 있으면 전문 영역으로 성장할 기회가 없습니다. 그리고 기획이 약하면 다시 과제 선정이 개인의 감에 의존하게 되는 악순환이 이어집니다.
이 문제는 개인의 역량이나 성향으로 풀리지 않습니다. 책임의 경계를 제도로 나누어야 풀립니다. 이 이야기는 마지막 장에서 다시 다루겠습니다.
5. 사람도 바뀌었습니다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조직 구성원 자체가 달라졌습니다.
평생직장을 전제로 조직에 헌신하던 세대와, 개인의 커리어 경로를 중심에 두고 일하는 MZ세대는 같은 관리체계 안에서 전혀 다르게 반응합니다. 긱 이코노미가 확산되면서 사회 전반의 고용 문화도 바뀌었습니다.
"조직에 오래 있을 사람이니 노하우는 그 사람 안에 쌓아두면 된다"는 암묵적 전제가 더 이상 성립하지 않는 것입니다.
6. 전략과 기획, 그리고 '지속되는 것'에 대하여
여기서 국내 기업의 구조적 특성 하나를 짚어야 합니다. 조심스러운 주제지만, 시스템을 설계하는 입장에서는 피해갈 수 없는 부분입니다.
국내 상당수 기업은 오너 중심의 의사결정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이 구조에는 분명한 강점이 있습니다. 결단이 빠르고, 장기 투자를 밀어붙일 수 있으며, 단기 실적 압박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압축 성장기에는 이것이 결정적인 경쟁력이었습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중장기 전략과 기획 기능이 조직 안에 두텁게 축적될 기회는 상대적으로 적었습니다. 최종 판단이 위에서 내려오는 구조에서는, 그 판단에 이르는 과정을 조직이 함께 만들고 기록할 필요가 크지 않기 때문입니다.
R&D는 이 취약함이 특히 크게 드러나는 영역입니다. 성과가 수년 뒤에 나오고, 그동안의 판단이 누적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 과제 포트폴리오를 설계하는 주체가 불분명합니다.
- 과제 선정 기준이 문서화되지 않고 그때그때의 판단에 의존합니다.
- 중단 결정의 요건이 제도로 정의되어 있지 않아 판단이 개인에게 떠넘겨집니다.
- 판단의 근거가 남지 않아 담당자가 바뀌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합니다.
앞 장에서 본 '책임의 경계가 없는 문제'도 결국 여기서 나옵니다. 선정을 담당할 기획 기능이 조직 안에 자리 잡고 있지 않으니, 그 책임이 실행자에게 얹히는 것입니다.
바뀌는 것과, 바뀌지 않아야 하는 것
이 문제를 저희는 이렇게 정리합니다.
기업 안에는 바뀔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이사회, CEO와 CTO, 임원, 그리고 종업원. 사람은 언젠가 바뀝니다.
그리고 바뀌지 않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프로세스, 규칙, 데이터베이스, 축적된 판단의 이력. 눈에 보이지 않지만 조직을 지탱하는 무형의 기반 시설입니다.
법인(Corporation)은 지속되는 실체이고, 개인은 대체 가능한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기업 차원의 노하우는 사람이 아니라 이 무형의 기반 시설에 담겨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시스템의 역할이 분명해집니다.
전략과 기획은 사람의 머릿속이 아니라 시스템 안에 녹아 있어야 합니다.
과제 선정 기준이 시스템 안에 절차로 들어 있으면, 담당자가 바뀌어도 기준은 남습니다. 중단 결정의 요건이 게이트로 정의되어 있으면, 그것은 누군가의 결단이 아니라 제도의 작동이 됩니다. 검토 이력과 코멘트가 쌓이면, 판단의 근거가 조직 자산이 됩니다.
이것이 저희가 말하는 "시스템이 아닌 기업 자산"의 실제 의미입니다.
7. 그래서 현장에서는 이런 모습이 반복됩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실제 현장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 엑셀과 개인 폴더에 흩어진 관리. 과제 정보가 담당자 PC 안에 있습니다. 개인별 관리범위에 머물러 사람이 나가면 같이 나갑니다.
- 보고를 위한 시스템. 분기 말에 실적을 취합하는 용도로만 쓰입니다. 의사결정 과정에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사후 정리 도구이지 관리 도구가 아닙니다.
- 연구원의 행정 부담 증가. 관리를 강화할수록 입력 항목이 늘고, 입력 항목이 늘수록 성의 없는 입력이 늘어납니다. 그러면 데이터 품질이 떨어지고, 다시 관리를 강화하는 악순환이 생깁니다.
- Intelligence 활동의 증발. 기술 동향, 규제 변화, 경쟁사 정보를 열심히 조사하지만 개인 보고서로 끝납니다. 같은 자료를 6개월 뒤 다른 사람이 다시 찾습니다.
- ERP·MES는 성숙한데 R&D만 지연. 생산과 회계는 십수 년 전에 시스템화가 끝났는데, 연구소는 여전히 엑셀입니다. 무형의 업무라서 어렵기 때문입니다.
8.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정리하겠습니다.
지금의 관리체계는 잘못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다른 시대에 맞게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그렇다면 무엇부터 손대야 할까요. 저희는 Planning과 Execution을 분리하는 것이 출발점이라고 봅니다. 앞서 4장에서 본 '선정의 책임과 실행의 책임'을 조직 구조와 시스템에서 실제로 갈라놓는 일입니다.
지금까지는 하나의 프로젝트 안에 기획·실행·보고가 세로로 붙어 있었습니다. 과제를 맡은 사람이 계획도 세우고 실행도 하고 보고도 합니다. 목표가 명확했던 시절에는 이것으로 충분했습니다.
First Mover 환경에서는 이 구조를 가로로 재편해야 합니다.
- Intelligence — 기술·시장·비즈니스 정보를 조직 차원에서 수집하고 분류하고 축적한다
- Planning(Decision Making) — 그 정보를 바탕으로 살아 있는 전략과 계획을 만들고 판단한다. 선정의 책임이 여기 있습니다.
- Execution — 판단된 것을 실행한다. 내부 개발, 외부 위탁, M&A 등 방법은 다양하게. 실행의 책임이 여기 있습니다.
이렇게 나누면 실패의 원인을 가릴 수 있게 됩니다. 방향이 틀렸다면 Intelligence와 Planning을 보완하고, 실행이 부족했다면 그쪽을 보완하면 됩니다. 그리고 연구책임자는 선정 책임의 부담에서 벗어나 도전적인 과제를 수행할 수 있게 됩니다.
기획이 실행에 묻혀 있으면 전문성이 자라지 않습니다. 분리되어야 각각이 전문 영역으로 성장합니다. 그리고 이 세 기능이 연결되어 돌아가려면, 그것을 담을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물론 이것은 시스템 하나로 끝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만 저희가 25년간 확인한 것은, 관리체계를 다시 설계하는 작업이 조직의 일하는 방식을 점검하는 가장 실질적인 계기가 된다는 점입니다. 시스템을 만들려면 결국 "우리는 어떻게 일하는가"에 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음 편 예고
다음 편에서는 그 구체적인 방법을 다뤄보겠습니다. 연구원의 입력 부담을 늘리지 않으면서 관리가 되는 시스템은 어떻게 설계하는가. 저희가 현장에서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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