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엔터프라이즈 — 법인의 기억은 어디에 쌓이는가
이론과 현장 - 2
담당자가 바뀌고 나서 답이 안 나오는 질문들이 있습니다.
"그때 왜 그 방향으로 갔죠." "이 업체는 왜 쓰게 된 겁니까." "이건 누가 언제 정한 거죠."
물어볼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고 문서를 뒤져도 안 나옵니다. 결과는 있는데 그 결과에 이르는 과정이 없습니다.
회사는 그대로 있습니다. 계약도 유효하고 책임도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회사가 그걸 모릅니다.
법인의 기억은 어디에 있습니까
여기서 한 발 물러서서 생각해 보게 됩니다
법인은 법적으로 인격체입니다. 계약을 맺고, 소송의 당사자가 되고, 책임을 집니다. 주인은 주주이고, 사람과 별개로 존재합니다.
그런데 그 인격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잘 묻지 않습니다.
| 개인 | 법인 | |
|---|---|---|
| 주인 | 자기 자신 | 주주 |
| 기억 | 머릿속 | ? |
한 칸이 비어 있습니다.
나눠 보면 이렇습니다
법인과 개인이 하는 일이 다릅니다.
| 무엇을 하는가 | 법인 | 개인 |
|---|---|---|
| 역할 | 기억합니다 | 판단하고 실행합니다 |
법인이 기억을 갖고 있으면, 개인은 그것을 가져다 판단하고 실행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다시 법인의 기억이 됩니다. 다음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 씁니다.
이 구조라면 사람이 바뀌어도 법인은 이어집니다. 기억은 법인에 있고, 수행할 사람만 바뀌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바뀌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기억도 개인이 갖고 있습니다
지금은 다릅니다.
무엇을 왜 그렇게 정했는지, 이 업체를 왜 쓰게 됐는지, 그때 무엇을 보고 판단했는지. 이것들이 사람 머릿속에 있습니다.
개인이 법인의 일까지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나가면 법인이 기억을 잃습니다. 그런데 책임은 그대로 남습니다.
기억을 잃은 채로 책임만 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한 곳에 오래 머물렀기 때문입니다.
기억이 개인에게 있어도, 그 개인이 계속 있으면 사실상 법인 안에 있는 것과 같았습니다. 굳이 옮겨 담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 전제를 더는 놓을 수 없습니다. 예전에는 드물게 일어나던 일이 지금은 자주 일어납니다.
왜 구두로 시키게 되는가
그러면 왜 시스템에 안 남을까요.
흔히 기록 문화가 없어서라고 합니다. 그런데 현장을 보면 다른 순환이 돌고 있습니다.
계획이 사람 안에 있었습니다
계획도 같은 이야기입니다.
무엇을 어떤 순서로 해야 하는지, 어디서 막히는지, 얼마나 걸리는지. 이건 법인의 기억이어야 하는데 개인의 기억이었습니다.
오래 일한 사람은 적지 않아도 압니다. 그래서 계획서에 다 적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적힌 것은 뼈대뿐이고 살은 사람 안에 있었습니다.
문서에 없고 사람 안에만 있는 것을 암묵지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 방식이 오래 굳어져 관행이 됐습니다.
그래서 계획이 뼈대만 남습니다
과제 계획에 처방 개발 하나로 여섯 달이 잡혀 있습니다. 그 안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적혀 있지 않습니다.
대충 쓴 것이 아니라 안 써도 됐던 것입니다. 그리고 계획을 검토할 때도 주요 일정과 최종 성과를 보지, 중간 과정은 잘 안 봅니다.
그러면 담을 자리가 없습니다
일은 수시로 생깁니다. 규제를 확인해야 하고, 원료를 다시 알아봐야 하고, 고객사에 회신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일을 어디에 걸어야 할지 모릅니다. 시스템에 처방 개발 하나만 있으니까요.
그래서 말로 시킵니다
시스템에 없는 일을 시스템으로 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말로 합니다. 옆에 가서 부탁하고, 전화하고, 메시지를 보냅니다.
게을러서가 아닙니다. 담을 자리가 없어서입니다.
그리고 시스템은 더 허술해집니다
말로 시킨 일은 시스템에 안 들어옵니다. 그러면 시스템에 있는 것은 처음에 적은 뼈대뿐입니다.
다음에 계획을 세울 때 참고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또 뼈대만 적습니다.
| 계획이 사람 안에 있다 |
| ↓ |
| 계획서는 뼈대만 |
| ↓ |
| 담을 자리가 없다 |
| ↓ |
| 말로 시킨다 |
| ↓ |
| 시스템에 안 들어온다 |
| ↓ |
| 참고할 것이 없다 |
| ↓ |
| 또 뼈대만 ↩ (반복) |
담을 자리를 먼저 만듭니다
이 순환을 어디서 끊을까요.
구두 지시를 금지하는 쪽은 안 됩니다. 담을 자리가 없는데 담으라고 하는 것이니까요. 그러면 형식적으로 채우거나, 아니면 그냥 안 합니다.
자리를 먼저 만드는 쪽입니다.
과제를 수행하려면 반드시 해야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배합을 설계하고, 시험하고, 안정성을 보고, 규제를 확인하고, 고객사와 조율합니다.
계획을 세울 때 이것들을 갈라 두면, 일이 생겼을 때 어디에 걸지가 정해져 있습니다.
그리고 걸 자리가 있으면 거는 것이 말하는 것보다 느리지 않습니다.
자리가 없어서 말로 한 것이지, 말이 편해서 말로 한 것이 아닙니다.
대화는 그대로 두고, 일만 시스템으로
자리가 생기면 그다음이 가능해집니다.
개인과 개인이 직접 주고받으면 법인은 그 자리에 없습니다. 둘 사이에서 일어난 일이고, 법인은 그 일이 있었다는 것조차 모릅니다.
그런데 결과에 대한 책임은 법인이 집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법인이 있어야 합니다
일을 맡기고 받는 것이 시스템을 거치게 하는 것입니다.
시스템에 있는 일을 할당받고, 수행하고, 결과를 시스템에 남깁니다. 그러면 그 일은 법인의 일이 됩니다.
법인이 기억하는 존재라면, 법인을 거치지 않은 일은 법인이 기억할 방법이 없습니다.
시스템을 거치라는 것은 절차의 문제가 아닙니다. 법인이 기억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대화를 없애자는 것이 아닙니다.
물어보고 의논하는 것은 계속합니다. 그게 빠르고, 그래야 일이 됩니다. 다만 일을 맡기고 결과를 확인하는 것은 시스템에서 합니다.
순서의 문제가 아닙니다
말로 먼저 시켜도 됩니다. 급한 일이 그렇게 돌아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다만 시스템에 없으면 그 일은 없는 일입니다. 나중에라도 들어와야 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넣는 일이 번거로우면 아무도 안 넣습니다. 그러니 넣는 일이 가벼워야 합니다. 걸 자리가 이미 있으면 가볍습니다.
결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일이 끝났다는 것을 누가 압니까.
시킨 사람이 압니다. 그 사람만 압니다.
결과가 시스템에 없으면 법인은 그 일이 끝났는지도, 무엇이 나왔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이미 해봤습니다
이게 이론만은 아닙니다.
코로나 때 우리는 강제로 이 방식을 했습니다.
옆자리에 물어볼 수가 없었습니다. 회의실에 모일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전부 시스템을 거쳤습니다. 일을 맡기는 것도, 결과를 확인하는 것도요.
그리고 일이 돌아갔습니다.
불편했지만 됐습니다. 그리고 그때 누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가 오히려 더 잘 보였다는 이야기를 여러 곳에서 들었습니다.
그런데 되돌아갔습니다
대면이 돌아오자 다시 옆자리에 물어보게 됐습니다. 편하니까요.
그리고 시스템은 다시 비어 갔습니다.
그때가 예외였던 것이 아닙니다. 그때 잠깐 다른 방식으로 일해 본 것입니다.
지금 조건이 그때와 닮았습니다
| 코로나 | 지금 | |
|---|---|---|
| 무엇이 막혔나 | 공간 — 옆에 없음 | 시간 — 그 사람이 없음 |
| 결과 | 물어볼 수 없음 | 물어볼 수 없음 |
사람이 자주 바뀌면 물어볼 데가 없어지는 것은 같습니다.
다만 하나가 다릅니다. 코로나 때는 잠깐 그랬고 돌아왔습니다. 사람이 바뀌는 것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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