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축은 끝났는데, 운영은 시작됐습니까
구축의 순서 - 6
반년 만에 열어봤습니다
오픈하고 석 달까지는 잘 굴러갔습니다. 교육도 했고, 담당자들이 열심히 입력했고, 시연도 좋았습니다.
반년쯤 지나 오랜만에 열어봅니다.
최근 두 달 입력이 거의 없습니다.
몇 명에게 물어봅니다. 안 쓴다는 말은 안 합니다. "요즘 바빠서요", "일단 급한 것부터 하고 나중에 정리하려고요". 그리고 그 나중은 오지 않습니다.
시스템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잘 만들어졌고, 오류도 없습니다.
구축은 끝났는데 운영이 시작되지 않은 것입니다.
계획서에 운영이 없습니다
먼저 짚고 시작할 것이 있습니다.
구축 프로젝트 계획서를 보면 대개 오픈까지입니다. 요건 정의, 설계, 개발, 테스트, 오픈. 여기서 끝납니다. 그 뒤에 "안정화"라는 이름으로 두세 달이 붙어 있는데, 그건 오류를 잡는 기간이지 정착 기간이 아닙니다.
예산도 인력도 오픈 시점에 맞춰져 있습니다. 오픈하면 프로젝트 팀은 해산하고, 담당자는 원래 업무로 돌아갑니다. 정착을 책임지는 사람이 남지 않습니다.
왜 이렇게 되는지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누가 이 프로젝트의 주인인가입니다.
IT 부서가 주체이면 목표가 성공적인 구축이 됩니다. 일정 안에, 예산 안에, 요건대로 만드는 것. 그게 IT의 일이고 평가받는 기준입니다. 오픈하면 성공입니다.
현업이 주체이면 목표가 운영이 됩니다. 만들어서 쓰는 것이 목적이니 오픈은 중간 지점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시스템 구축은 IT 부서가 주관합니다. 그러면 계획서도 오픈까지만 그려집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닙니다. 각자 자기 목표에 충실한 것뿐입니다.
구축은 프로젝트지만 운영은 끝이 없습니다. 성격이 다른 일인데 같은 계획서에 한 줄로 들어가 있고, 대개 그 한 줄이 지켜지지 않습니다.
왜 ERP는 안 멈추나
같은 회사에서 어떤 시스템은 20년째 잘 돌아갑니다. ERP가 그렇습니다. 아무도 "ERP 정착 전략"을 세우지 않았는데도 계속 쓰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안 쓰면 일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주문을 안 넣으면 물건이 안 나갑니다. 자재를 청구 안 하면 재료가 안 옵니다. 전표를 안 끊으면 돈이 안 나갑니다. 강제할 필요가 없습니다. 안 쓰면 본인이 곤란해집니다.
2편에서 이야기한 Transaction 업무가 이런 성격입니다. 절차가 있고, 그 절차를 안 밟으면 다음이 안 굴러갑니다.
의사결정 기록은 다릅니다
안 남겨도 오늘은 아무 일이 없습니다.
과제 방향을 바꿨는데 그 판단을 기록 안 했습니다. 오늘 무슨 일이 생깁니까. 아무 일도 안 생깁니다. 과제는 그대로 굴러가고, 아무도 뭐라 하지 않습니다.
문제가 드러나는 것은 3년 뒤입니다. 담당자가 바뀌고, 규제가 바뀌고, 그때 왜 그렇게 정했는지를 물어야 할 때입니다.
3년 뒤에 아플 일을 오늘 하라는 것이 이 시스템입니다. 그리고 사람은 그렇게 움직이지 않습니다. 오늘 급한 일이 있으면 3년 뒤 일은 미뤄집니다. 게으름이 아니라 당연한 판단입니다.
멈추는 세 가지 이유
하나, TFT 인원만 씁니다.
구축에 참여한 사람들은 씁니다. 자기가 만든 것이고, 왜 필요한지 아니까요.
그런데 그 밖의 사람들은 안 씁니다. 그리고 안 써도 일이 됩니다.
보고는 여전히 말로 올라가고, 지시는 여전히 회의에서 내려옵니다. 기존 체계가 그대로 살아 있으니 시스템은 그 위에 얹힌 추가 작업이 됩니다.
이 상태에서 사용률을 보면 착시가 생깁니다. TFT 인원이 열심히 쓰고 있으니 숫자가 그럴듯합니다. 실제로는 스무 명 중 다섯 명만 쓰고 있는데요.
둘, 쓰는 사람과 쓸모를 보는 사람이 다릅니다.
입력은 실무자가 합니다. 그런데 그 기록으로 이득을 보는 것은 3년 뒤의 다른 사람이거나 조회를 하는 관리자입니다. 오늘 수고하는 사람과 나중에 덕 보는 사람이 다르면 동기가 안 생깁니다.
셋, 처음에는 조회해도 안 나옵니다.
쌓인 것이 있어야 조회에서 뭐가 나옵니다. 그런데 쌓이려면 써야 합니다. 쓸모를 보려면 쌓여야 하고, 쌓이려면 써야 합니다.
그래서 초반 몇 달은 쓸모가 없는 채로 써야 합니다. 이 기간을 어떻게 건너느냐가 정착의 전부입니다.
기존 체계를 어떻게 할 것인가
세 가지 이유 중 첫 번째가 가장 중요합니다. 기존 보고·지시 체계가 그대로 살아 있는 한, 시스템은 계속 추가 작업입니다.
이 상태에서 강제하면 어떻게 되나. 두 번 일하게 됩니다. 말로 보고하고 시스템에도 적습니다. 그러면 반발만 생기고, 결국 시스템 쪽이 밀립니다. 당연합니다. 말로 하는 게 빠르니까요.
그래서 기존 체계를 어떻게 할지부터 정해야 합니다. 이게 생각보다 큰 일이고, 체계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걷어내는 것입니다. 그 결정은 이제 시스템으로만 올린다고 정합니다. 깔끔하지만 저항이 큽니다.
다른 하나는 엮는 것입니다. 반드시 해야 하는 업무에 붙입니다. 심의 안건을 시스템으로만 올릴 수 있게 하면, 심의를 받으려면 쓸 수밖에 없습니다.
엮는 쪽이 대개 현실적입니다. 그리고 방법이 여럿 있습니다.
주간업무 보고를 시스템 안으로 옮기는 것이 그중 하나입니다. 주간회의를 시스템 화면을 열어놓고 진행합니다. 자료를 따로 만들지 않고 화면을 보면서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하면 몇 가지가 한 번에 해결됩니다. 입력하지 않으면 회의에서 자기 일이 안 보입니다. 안 쓰면 본인이 곤란해지는 상태가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주간보고 자료를 따로 만들던 수고가 없어지니, 추가 작업이 아니라 대체 작업이 됩니다.
무엇보다 경영진과 관리자가 그 화면을 매주 봅니다. 안 쓰는 사람이 누구인지 자연스럽게 드러나고, 화면이 불편하면 그 자리에서 이야기가 나옵니다.
앞에서 ERP가 왜 안 멈추는지 봤습니다. 안 쓰면 일이 안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의사결정 기록도 그 상태에 가깝게 만들 수 있습니다. 저절로 그렇게 되지는 않으니 설계해야 합니다.
초기에는 반강제가 필요합니다
기존 체계를 정리했어도 초기에는 강제가 필요합니다.
권장이나 유도로는 안 됩니다. "가급적 입력해 주세요"는 "안 해도 된다"로 읽힙니다. 그리고 안 해도 오늘 아무 일이 없으니 안 하게 됩니다.
두 가지만 분명히 해두겠습니다.
강제하는 대상이 무엇인지입니다. 판단을 강제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무엇을 결정할지는 여전히 사람이 정합니다. 강제하는 것은 결정했으면 남기라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이건 초기 이야기입니다. 쌓인 것이 쓰이기 시작하면 강제가 필요 없어집니다. 강제는 그 기간을 건너기 위한 장치이지 운영 방식이 아닙니다.
3편에서 코드 선택을 건너뛸 수 없게 하자고 했는데, 같은 이야기입니다. 다만 조건이 있었습니다. 필수로 만들려면 그만큼 쉬워야 합니다.
경영진 의지가 왜 중요한가
여기서 경영진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흔히 하는 이야기와는 다릅니다.
경영진 의지가 필요한 이유는 감시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시스템을 고칠 여지를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반강제로 시작하면 반드시 불편하다는 말이 나옵니다. 입력이 많다, 화면이 복잡하다, 이건 왜 필요하냐. 당연한 반응이고, 대부분 타당합니다.
이때 경영진 의지가 있으면 고칠 수 있습니다. 예산과 시간을 들여 화면을 줄이고, 자동으로 채울 수 있는 것은 채우고, 필요 없는 항목은 뺍니다. 불편하다는 말이 개선 요구로 처리됩니다.
반대로 임의성을 주면 어떻게 되나.
불편하다는 말이 나와도 "그럼 안 쓰셔도 됩니다"로 끝납니다.
고칠 이유가 없어집니다. 예산을 들여 화면을 고칠 근거가 없고, 담당자를 붙일 명분도 없습니다. 불편함이 개선으로 이어지지 않고 이탈로 이어집니다.
그렇게 반년이 지나면 아무도 안 씁니다. 그리고 회고에는 이렇게 적힙니다. "현업 수용성이 낮았음."
강제하면 개선이 따라오고, 임의성을 주면 개선도 함께 멈춥니다. 역설처럼 들리지만 실제로 그렇습니다.
그러면 경영진을 어떻게 끌어들입니까
이게 실무자에게 가장 어려운 부분입니다.
"기록이 중요합니다"로는 안 됩니다. 옳은 말이지만 오늘 급한 일이 아니니까요.
경영진이 반응하는 것은 자기가 답을 못 하는 질문입니다.
규제가 바뀌었을 때 우리 과제 중 몇 개가 영향받는지. 작년에 검토했다가 접은 후보가 무엇이었는지. 그 위탁처를 왜 안 쓰기로 했는지. 지금 물어보면 답이 안 나오는 것들입니다.
그 질문을 먼저 던지는 편이 낫습니다. 시스템 이야기보다 앞서요.
정착의 신호
그러면 정착됐다는 것을 무엇으로 압니까.
사용률이나 입력 건수로는 알 수 없습니다. 그건 강제하면 올라가니까요.
사람이 바뀌었는데도 이력이 조회될 때입니다.
담당자가 교체됐습니다. 후임이 3년 전 결정을 열어봅니다. 그때 무엇을 전제로 했는지, 어떤 후보를 왜 접었는지, 어느 부서가 뭐라고 했는지가 나옵니다.
전임자에게 전화하지 않아도 됩니다.
지난 글에서 자료를 찾다가 결국 전임자에게 전화를 거는 장면을 이야기했습니다. 그 전화를 안 걸어도 되는 날이 오면, 그때 정착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부터는 강제가 필요 없어집니다. 쓸모를 본 사람은 시키지 않아도 씁니다. 그리고 "이것도 넣어두면 좋겠다"는 말이 현업에서 먼저 나오기 시작합니다.
정리하면
계획서에 운영이 들어 있어야 합니다. IT가 주체이면 오픈이 목표가 되고, 현업이 주체이면 운영이 목표가 됩니다.
기존 체계를 그대로 두면 시스템은 계속 추가 작업입니다. 걷어내거나 엮어야 합니다. 주간회의를 시스템 화면으로 진행하는 것이 한 방법입니다.
초기에는 반강제가 필요합니다. 강제하는 것은 판단이 아니라 기록이고, 초기에 한정된 장치입니다.
경영진 의지는 감시가 아니라 개선 여지를 만듭니다. 그리고 경영진은 자기가 답을 못 하는 질문에 반응합니다.
정착의 신호는 사람이 바뀌어도 조회되는 것입니다.
다음 편에서는
반강제로 시작하되 불편하면 고쳐준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고칩니까.
화면을 줄이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남겨야 할 것은 남겨야 하니까요. 입력할 것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입력하는 수고를 줄여야 합니다.
여기가 AI의 자리입니다. 그리고 흔히 알려진 것과 순서가 반대입니다. AI를 도입하면 기록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AI가 부담을 줄여줘서 기록이 쌓입니다. 마지막 편에서 다루겠습니다.
저희는 25년 동안 제약·바이오·화장품·화학·건설·제조 분야에서 R&D 관리 체계를 함께 만들어 왔습니다. 이미 갖추신 것을 먼저 확인하고, 그 위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함께 정리합니다. 이야기 나눌 자리가 필요하시면 언제든 연락 주십시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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